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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동 말죽거리의 잔혹사

말죽거리 잔혹사
말죽거리 잔혹사

2004년 개봉한 말죽거리 잔혹사는 유하 감독 작품으로 1978년의 시기를 바탕으로 예전 향수도 느낄 수 있고, 잔잔하면서도 액션이 있는 우리 시대의 영화 같은 친근함이 있던 작품이다. 영화 평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너무나 재밌게 봤었고 영화 속 현수의 복수를 위한 운동 프로젝트를 보고 한때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의지를 준 영화이다. 몇 번 tv를 통해서 봤지만 볼 때마다 옛 추억과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영화다. 당시 인기였던 권상우 주연으로 햄버거 등 조연들의 빛나는 연기로 너무 재밌었던 작품이고 지금까지 버거형으로 불리는 박효준을 있게 한 영화이다. 이 작품의 우식 역을 맡았던 이정진은 이후 괜찮은 작품이 없다는 게 아쉬운 작품이다. 차종훈 역을 맡았던 이종혁의 악역도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치타 역의 백봉기 배우도 기억에 남는다. 주연배우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훌륭한 작품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관람 추이, 나이별 만족도

연출 25%, OST 11%, 영상미 12%, 스토리 26%, 연기 26% 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10대 8.83, 20대 8.58, 30대 8.99, 40대 9.10, 50대 9.10으로 전 연령층 평점이 높다. 이 시대를 살아온 40대 이상은 정말 많이 공감하여 높은 평점을 주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말죽거리의 의미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 거리 일대를 말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양재역이 있었고 여행자들이 타고 온 말에게 쉬면서 죽을 끓여 먹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신할 때 말에 올라타 죽을 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유래도 있다. 마죽거리 로도 불렸다.

 

말죽거리 잔혹사 이소룡이 되고싶었던 현수

절권도의 창시자 이소룡은 과거에 무술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한 무술이 아니라 단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절권도는 우리에게 뒤돌아보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단 길이 정해지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소룡이라는 배우가 우리를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이소룡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남자였다. 그때 꿈이 있다면 이소룡처럼 되고 싶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 있다. 나에게 1978년은 그런 날이다. 그해 봄, 우리 집은 강남으로 이사했다. 앞으로 강남 땅값이 크게 오를 것으로 전망한 어머니는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 내가 전학을 간 곳은 말죽거리 근처의 정문고등학교였다. 정문의 악명을 어렴풋이 들었지만,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1978년 말 죽거리 봄, 현수는 강남의 정문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정문고등학교는 교사 폭력 외에도 학생들 간의 권력투쟁으로 악명이 높다. 모범생인 현수와 전교 싸움 1등 우식은 이소룡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금세 친구가 되었다. 현수와 우식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은주를 보게 되고 둘은 은주에게 금방 사랑에 빠진다. 은주는 다정한 현수보다 남자다운 우식을 사랑하게 된다. 반면 우식과 선도부장 종훈은 전교 싸움 1등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종훈은 비열한 방식으로 우식에게 이기고 우식은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학교를 떠난다. 우식이 없는 학교는 종훈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을 괴롭혔고, 열등반으로 분류돼서 교사들의 폭력이 잦았고 은주마저 우식을 선택하자 현수의 분노가 폭발한다. 현수는 밤새 운동하여 빌드업을 하고 쌍절곤을 연습했다. 급기야 종훈이 어떤 학생을 괴롭혔는데 너무나 화가 난 현수는 종훈을 옥상으로 불러냈고 연습했던 쌍절곤으로 기습하며 주도권을 잡아간다.

 

이소룡 엽문의 제자 절권도의 창시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940년에 태어났다. 중국인 아버지와 중국, 독일 혼혈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후 부모님의 고향인 홍콩에서 자라고 아역배우로도 활동하였다. 어릴 때 몸이 약해서 태극권을 배우며 무술에 입문하게 된다. 영춘권의 창시자인 엽문의 제자이기도 하고 절권도의 창시자 이기도 하다. 근시가 심해서 근접전인 영춘권이 본인의 스타일에 맞았다고 한다. 미국 생활 후 홍콩으로 돌아와서 당산대형으로 스타가 되고, 정무문으로 최고 스타가 된다. 용쟁호투 작품 촬영을 마지막으로 애인의 침대 위에서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아직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소문과 논란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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